예정된 시리즈 중 첫번째로, The Observer는 테네시아 다카스 박사와 김윤아 교수의
미국 이민자들로서의 배경을 바탕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테네시아 다카스
테네시아 다카스씨는 캔자스 주립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경제학과 교수입니다. 다카스씨는 자메이카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인 킹스턴에서 자랐습니다.
“저는 다섯 자매 중 장녀이고, 제가 자라는 시절 거의 대부분은 저의 어머니는 싱글맘이었습니다.” 다카스씨는 말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일찍이 형제 자매를 돌보는 일을 많이 맡았었고, 우리가 먹을 만큼의 충분한 음식을 갖는 것과 같이 삶의 기본적인 것에 얼마나 집중했는지 기억합니다. 우리는 어머니가 급여를 받는 달까지 며칠이 남았는지 세곤 했습니다.”
다카스씨는 어린 시절에 금전적으로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다카스씨의 어머니는 교육의 가치를 이해하고 그녀와 형제 자매가 필요한 것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했습니다. 추가 근무를 하셨고, 우리가 책들은 가질 수 있도록 다른 일자리도 구했습니다. 자메이카에서는 일부 책은 제공이 되지만, 모든 책들이 제공되지는 않았습니다. 학교의 학기가 가까워질수록 모든 책을 확보하기 위해서, 저의 어머니께서 두 번째 일자리를 구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다카스씨는 University of the West Indies에서 학사 학위를 마쳤습니다. “그 후에 저는 일자리를 구했지만 처음 생각했던 것 만큼 보람이 없었고, 제가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 더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다카스씨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20대 때 저의 최종 목표는 선진국에서 필요한 자격을 취득한 다음, 저의 고향으로 귀국하여 젊은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에 기여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때의 저의 목표는 University of [of West Indies]에 교수로 합류하는 것이었습니다.”
2014년, 다카스씨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Kansas State University에서 PHD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제 관점이 바뀌었어요, 종종 이민자들이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에 관련된 관점이었어요.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온 사람으로서 미국은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어요. 그리고 당신이 다른 선진국에서 미주로 이주했다면 대게 더욱 더 가족을 돕는 역할의 사람으로 변합니다. 제가 머물기로 결정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어요. 미국에서 살면 교육에 대한 보상이 더 많을 거라고 믿었고, 그러면 고향에 있는 가족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카스씨가 말했습니다.
PHD과정을 졸업한 후, 다카스씨는 전국의 여러 대학과 면접을 봤습니다. “센트럴은 정말 특별했어요. 이곳에 왔을 때 본 것들이 정말 좋았어요. 교수진분들은 저를 따뜻하게 대해줬어요. 저는 이 대학이 다양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제가 그 부분에 기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카스씨가 말했습니다. “자메이카에서는 인구의 95%가 흑인이에요. 그래서 그곳에 있을 때, 당신은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을 인지하죠. 그러나 이 부분은 다른 문화적 배경들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고, 심지어 제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다르게 대우 받는 것은 흔히 상기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카스씨에게 앨랜스버그의 다양성 부족은 매우 눈에 띄었습니다. 그녀는 학교 캠퍼스에서 Diversity and Equity Center와 THRIVE와 같은 많은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름 기간과 주말에은 다양성 부족이 더 눈에 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들이 공원으로 걸어가서 다른 유색인종을 본 것을 기억합니다. 그는 너무 기뻐했습니다. 저의 아들은 네 살인데요, ‘엄마, 저 분은 저랑 비슷해요!’라고 말했어요. 이런 경험은 우리가 흔히 경험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성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어요.” “
다카스씨는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라고 불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으로 오는 이민자들은 빈둥거리며 빌붙어 지내거나, 짐이 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이민자들은 대부분 이곳이 기회의 땅이기 때문에 여기에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이민의 상당 부분은 긍정적입니다. 많은 이민자들은 고도로 숙련되어 있으며, 채워지지 않을 많은 일자리들은 맡고 있습니다. 이민자의 순이익은 강력합니다.”
김윤아
김윤아(윤)씨는2013년 파트너와 함께 한국에서 엘렌스버그로 이주한 한국어 및 문화 교수입니다. 김윤아씨는 한국의 수도인 동서울의 한 지역인 강동구에서 자랐습니다.
“[강동구]는 강남처럼 정말 고급스러운 곳은 아니었고, 상류 사회도 아니었지만 시골도 아니었어요. 정말 편안하고 안전한 곳 이었어요.” 김윤아씨 말했습니다. “여기가 저의 모든 가족 그리고 저의 어린 시절, 학창 시절이 있었던 곳이에요. 그곳에서 자란 어린 소녀인 제가 그리워요.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 또한 그리워요. 그때 [어렸을 때] 저는 사실 ‘아, 내가 한국의 대통령이 될 거야’라고 생각했었고, 큰 꿈과 큰 목표를 가지고 자란 어린 시절의 제가 그리워요. 그때 당시의 저는 제가 얼마나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지 몰랐었죠.”
김윤아씨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녔는데, 처음에는 동아방송예대에서, 그다음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김윤아씨는 “엘렌스버그로 이사를 와서, 두번째 학위는 한국에서 끝내지 못 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여기로 이사를 오기 전까지는 저는 저의 삶이 정말 좋고, 편안하고 특권 또한 누리고 있다는 걸 전혀 몰랐어요. 저는 큰 어려움도 걱정거리도 없었어요. 정말 편안하고 좋은 삶 이었어요. 그래서 여기로 이사를 온 후 저의 세상은 완전히 뒤집혀졌지요.”라고 김윤아씨는 말했습니다. 우선, 저는 충분한 서류들이 없었어요. 합법적으로 이민을 왔지만, 제가 겪었던 경험은 삶은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리는 것이었어요. 이 새로운 삶은 저를 일곱 살짜리 아이처럼 지내도록 했죠, 그 말인 즉슨, 저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어요.” 김윤아씨는 서류가 부족해서 운전이나, 술 구매 등도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야 했었고, 심지어 학생 비자로는 일을 할수도 없었다고 덧붙였습니다.
김윤아씨는 또한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방식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저를 다르게 대해요. 저는 고정관념적인 아시아 이민자처럼 분류되고 싶지 않아요. 어떤 사람들은 아시아 사람들을 모범 이민자들라고 부르는데, 아시아 이민자들은 대부분 변호사나 의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이죠. 사람들은 저를 모습만 보고 고정관념 적인 인종 아시아 이민자로 맞추지만, 그것은 제가 아니예요. 또한 언어 장벽과 다른 문화적 관점을 포함하여, 갑자기 저는 모든 면에서 소수자가 되었죠.”
미국에 온 후 김윤아씨는 CWU에서 학생 근로자와 정규 직원으로 여러 직책을 맡았습니다. 나중에, 김윤아씨는 연중 날씨가 따뜻하고, 엘렌스버그보다 민족 다양성이 다양한 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융합되어 지낼 수 있는, 마을 전반적으로 민족 다양성과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는 곳에서 살고 싶어요. 저는 저와 비슷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많은 사람들과 지내기를 바래요, 그게 저와 같이 한국에서 온 사람들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더 많은 다양성과 문화의 용광로를 원해요. 이 곳이 한국이든 미국이든 상관없어요. 저는 저의 모든 집, 한국과 미국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한국과 미국 두 집 모두 매우 다른 문화적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